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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엔 여성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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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작성일 23-08-24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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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여성 대표들이 모여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 토론회”를 개최했다. 남한은 가부장제 문화와 여성, 북한은 통일과 여성, 일본은 평화와 여성을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이 토론회는 분단 이후 한반도 땅에서 남북한 여성 대표들이 처음으로 만난 역사적인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난 46년 동안 달라진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확인하는 날이기도 했다.

가부장제 문화와 여성을 발표한 조형 교수는 남성 중심 및 남성 우월의식에 따른 가부장제 문화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이므로 가부장제 문화와 남성 지배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남북한 여성들이 함께 노력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가부장 문화와 남성문화, 군사문화를 동일 선상에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북한은 가부장제에 기초한 사회이지만 사회주의체제 아래에서 여성문제들이 거의 해결됐기 때문에 남한에서와 같은 여성 문제는 없다고 강조했다. 즉 북한은 사회제도에 의해서 완전한 여성 해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분단 46년 만에 만난 남북한 여성들은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 문화라는 동일한 현상을 두고 현격하게 다른 이해를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남한 여성들에게는 극복돼야 할 대상이 북한 여성들에게는 존중돼야 할 대상으로 전환돼 있었다. 물론 우리보다 앞서서 근로 여성의 권리 보장을 위한 다양한 제도들을 실시한 결과로 그들의 주장처럼 여성문제가 해결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여성 문제의 해결이 아닌 여성 문제에 대한 사유의 부재일 뿐이었다. 남녀 모두에게 동등한 사회참여의 기회가 제공된 반면 사회의 공사 영역 전반에 걸쳐 성별 분업이 존재했었지만 문제는 이를 차별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성차별이나 여성 억압의 원인을 자본주의와 경제적인 문제로 본다. 즉 자본주의 체제에서 남성들이 재산을 차지하면서 여성들은 아내로서 남성들에게 종속된다고 본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제도가 폐지돼야 여성 종속과 여성 억압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러한 도그마가 사회주의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여성 문제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 문화는 시대와 공간, 체제를 초월한 것으로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와도 정합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왜곡한 결과다.

게다가 북한은 사회 전체를 어버이 수령이 영도하는 대(大)가정에 비유하고 사람들에게 어버이 수령에 대해 충성과 효성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어버이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大)가정이라는 북한의 사회관은 가부장제 자체에 대한 비판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공사 영역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성별분업을 정당화하고 미덕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문제를 은폐시키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북한엔 여성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여성 문제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금기시하고 있을 뿐이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여성 대표들이 만난 지도 24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여성 문제에 대한 남북한 여성들의 인식의 차이는 얼마나 변화됐을까? 북한 사회의 여성 문제에 대한 무사유가 단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식 사회주의 도그마에 근거한 사유 불가능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거리감은 더 커졌을 것이다. 탈북 여성들이 남한 여성들의 높은 권리의식과 여성운동에 대해 한편으론 놀라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불편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북한에서의 사회화의 결과일 것이다. 통일한국의 성 평등 사회로의 전진을 위해서는 남북한 여성들의 가부장제 문화와 여성성에 대한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여성성은 미덕이 아닌 차별의 다른 표현임을 이해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